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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거리

인텔, 본격적으로 파운드리 사업에 뛰어들다

개인용 컴퓨터의 역사를 말할때는 물론이고 현재까지도 절대 그 이름을 빼놓을 수 없는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회사들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머릿속에 떠오른 회사들은 각각 다를 수 있겠습니다만, 인텔이라는 회사가 저 범주에 속한다는 곳을 부정할 수 있는 분은 없을 것입니다.

특히 지난 십수년동안 개인용 컴퓨터 시장에서 인텔의 영향력은 가히 독점이라 부를 만한 것이었습니다. 힘겹게 비 x86 CPU를 사용하고 있던 애플마저 인텔에 투항한 이후 개인용 컴퓨터 시장에서 인텔은 거의 독점적인 지위를 갖고 있습니다. 그나마 경쟁상대라 할 수 있는 AMD는 한 때의 영광을 뒤로 한 채 이제는 인텔이 반독점법에 걸리지 않도록 해주는 회사라는 우스개소리까지 듣고 있는 실정이지요.

이런 독점 시장에서도 꾸준히 외계인을 고문해왔던 인텔을 칭찬해야 하는 걸까요? 어쨌든 인텔은 AMD가 불도저급 규모의 삽질을 펼치는 와중에도 쉬지않고 기술개발을 해왔으니까요.

하지만 반도체 산업의 생리를 들추어본다면 인텔의 이런 행동은 매우 합리적이고 계산적인 것입니다. 반도체 산업은 규모의 경제가 가장 잘 적용되는 사업 중 하나이지요. 인텔이 독보적으로 공정개선을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역설적이게도 전 세계에서 가장 큰, 거의 독점이라 할 수 있을만한 많은 생산량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무어의 법칙

‘무어의 법칙’이라고 들어보셨나요? 18-24개월마다 칩에 집적되는 트랜지스터의 밀도가 두 배가 된다는, 얼핏 보면 단순해보이지만 지난 수십년동안 컴퓨터 산업 발전을 이끌어왔던 법칙이지요.

공정을 미세화하면 같은 면적에 집적할 수 있는 트랜지스터의 수가 늘어납니다. 늘어난 트랜지스터는 설계자들에게 있어 더 많은 자원이고 설계자들은 이렇게 늘어난 자원을 이용해 더 강력한 CPU를 설계합니다. 아, 물론 같은 면적에 두 배의 트랜지스터를 집적할 수 있다고 다음 세대의 칩이 이전세대에 비해 두 배의 트랜지스터를 달고 나오는 경우는 흔치 않지요.

흔히 말하는 ‘어른들의 사정’에 의해 다음 세대의 프로세서는 사용자의 업그레이드 욕구를 자극할 수 있을 정도로 성능이 올라가지만 최종적으로 생산되는 칩의 크기는 작아집니다. 개별적인 프로세서 칩의 크기가 줄어들면 하나의 웨이퍼에서 뽑아낼 수 있는 프로세서의 개수가 많아지기 때문에 제조원가를 줄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무어의 법칙이 착실히 지켜져 오던 지난 수십년간은 모두가 행복했습니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제조공정의 개선으로 가격 상승 없는 성능 향상을 맛볼 수 있었습니다. 칩을 제조, 판매하는 인텔 역시 적당히 늘어난 성능의 칩을 선보이면서 판매량을 꾸준히 유지하고, 공정 개선을 통해 제조원가를 절감하며 이익을 올렸습니다.

하지만 영원할 것 같던 무어의 법칙이 삐걱거리기 시작했습니다(링크). 여러 가지 물리적인 문제들이 발목을 잡았습니다. 먼저 제조공정상에서 여러 어려움이 발목을 잡았습니다. 현재 인텔의 최신 반도체 제조공정은 그 선폭이 14nm 수준인데다,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 10nm, 7nm 까지 공정을 미세화시킬 계획에 있습니다.


*이미지 출처 : CLIPAREA l Custom media/Shutterstock.com

여기서 10nm가 얼마나 작은 수치인지 감이 잘 안 오시는 분들이 계실텐데 우리 몸에서 가장 큰 세포인 난자의 직경이 대략 100000nm이고, 가장 작은 세포인 정자의 직경이 5000nm로 각각 10nm의 10000배, 500배라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어느 정도 감이 잡히시나요?

당연히 이 정도로 미세한 선폭으로 반도체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노력이 필요합니다. 미세 공정에서 발생하는 여러 가지 물리적인 문제들을 극복하기 위해 반도체를 구성하는 성분들을 조절하고, FinFET 구조를 도입하고 패턴을 여러 번에 걸쳐 그리는 멀티 패터닝 기법을 도입하는 등 갖은 노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공정 미세화에 따른 한계

이 지점에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공정이 미세화되면 될수록 공정을 추가적으로 미세화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연구와 더 비싼 장비들이 필요합니다. 더 많은 연구 역시 더 많은 외계인... 아니 연구원들이 더 많은 시행착오를 겪어야 한다는 것이고 결국 비용 상승과 같은 말입니다.

거기에 한 웨이퍼에서 더 많은 칩을 생산함으로써 얻을 수 있었던 제조단가의 감소 효과 역시 둔화되고 있습니다. 제조공정이 미세해질수록 수율 확보가 어려워지는 데다가 제조공정을 미세화시키기 위해 도입하는 여러 기법들 중에서는 단지 고정비만을 늘리는 것이 아니라 생산 비용 그 자체를 증가시키는 경우도 있습니다.


* 세대가 거듭할수록 연구개발, 장비 등 고정비가 급격히 증가합니다. 반면 절감되는 생산원가는 점점 적어집니다. 최신 공정으로 올수록 생산비용의 절감 효과가 줄어들게 됩니다.

물론 PC 시장이 계속해서 고속 성장한다면 인텔은 별다른 전략 변경 없이 현 체제를 유지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불행히도 PC 시장은 더 이상 성장하지 않고 있습니다. 성장은 커녕 후퇴를 걱정해야 할 처지에 놓여있지요.

최근 수 년간 컴퓨터 시장의 중심은 우리가 흔히 아는 PC의 형태에서 스마트폰, 스마트패드 등의 좀 더 개인화된 기기로 옮겨왔습니다. 하지만 PC 시장의 맹주였던 인텔은 특정 분야의 1인자가 흔히 저지르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급속히 성장하는 스마트폰 시장의 가치를 얕잡아본 것이지요.

인텔이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은 시점이었습니다. 인텔은 급한 대로 x86 기반의 프로세서를 모바일 버전에 맞게 설계하여 내놓았지만 시장의 반응은 냉담했습니다. 기술적인 우위가 시장에서의 우위를 보장해주지 못한다는, 과거에 인텔이 여러 회사들을 상대로 증명했던 컴퓨터 시장의 법칙을 스스로 체험하는 쓸쓸한 시간들의 연속이었습니다.

스마트폰 붐이 있기 전 파운드리 시장은 그리 크지 않았고, 부가가치 역시 높지 않았습니다. 칩의 설계, 생산, 판매를 모두 틀어쥐고 엄청난 고 부가가치 영업을 구가하던 인텔로써는 신경 쓸 필요도 없는 시장이었지요. 그리고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반도체 시장은 규모의 경제가 매우 잘 적용되는 시장입니다. 수년 전까지만 해도 삼성이나 TSMC등의 파운드리 업체와 인텔의 생산기술 격차는 엄청난 수준이었으며, 이를 좁히는 것은 쉽지 않아 보였지요.

하지만 상황은 반전되었습니다. 스마트폰 붐이 일어났을 때 인텔이 이 시장을 무시했기에 ARM 기반의 프로세서가 이 시장을 완전히 장악했습니다. 아시다시피 ARM은 칩의 설계에만 관여할 뿐 생산에 대해서는 전혀 관여하지 않는 팹리스 업체입니다. 당연히 ARM 기반의 칩을 생산해 줄 파운드리 업체가 필요했고, 삼성과 TSMC는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이내 스마트폰, 스마트패드 등 ARM 기반의 칩으로 구동되는 기기의 판매규모는 PC의 그것을 훌쩍 뛰어넘었고 여전히 성장하고 있습니다. 규모의 경제를 실현할 수 있게 된 삼성과 TSMC는 매우 빠르게 인텔과의 기술격차를 지워나가며 추월까지도 꿈꾸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인텔이 엄청난 규모의 리베이트를 쏟아부으면서까지 저가형 태블릿 시장에 자사 프로세서를 밀어넣으려 했던 이유입니다.


* 이 때까지만 해도 인텔과 다른 파운드리의 제조공정 사이에는 넘사벽의 차이가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인텔에게는 여러 번의 기회가 있었지만, 인텔은 이를 효과적으로 활용하지 못했습니다. 이제 인텔에게 남은 기회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인텔이 나머지 파운드리 업체들에 대해 미약하게나마 기술적 우위를 가지고 있는 시점인 지금이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습니다. 인텔의 경영진 역시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인 듯 합니다.

마침내 인텔이 결단을 내렸습니다.

인텔이 자사 팹의 문호를 개방했습니다. 물론 이전부터 인텔은 파운드리 사업에 진출하리라 공언했습니다. 하지만 그 규모나 적극성 면에서 기존의 파운드리 업체들과 경쟁할 수준이 아니었지요. 하지만 이제 인텔은 ARM과 협력하여 ARM의 여러 아키텍처들을 자사의 생산 공정에 최적화시켰습니다. 이제 고객사들은 ARM이 제공하는 여러 옵션을 인텔의 팹에서 손쉽게 선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번 IDF 발표에서 인텔은 이례적으로 고객사와 고객사가 사용할 공정 역시 발표했습니다. 친숙한 이름인 LG 전자는 아직 인텔의 최신 프로세서에도 적용되지 않은 10nm 공정을 이용할 것입니다. 아마 LG의 자체 개발 프로세서 '뉴클런'이겠지요. 그 외에도 스프레드트럼이 14nm, 아크로닉스 반도체가 22nm 공정을 이용해 제품을 생산할 것이라 밝혔습니다.

물론 이번 발표회에서 발표된 기업들만이 인텔의 공장을 이용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인텔의 고객 중에는 이런 식의 대외적 정보 공개를 꺼리는 고객사 역시 있을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인텔의 최신 공정이 애플의 새로운 A 칩을 생산해내고 있을지도 모르는 노릇이지요.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자면 애플이 자체 설계한 칩이 인텔 공장에서 생산되어 맥에 실릴 수도 있겠군요.

어쨌거나, 인텔은 자사 팹을 파운드리로 개방함으로써 자사의 칩만 생산하던 때보다 훨씬 더 많은 칩을 생산할 수 있게 될 것이고, 이는 인텔이 좀 더 공격적으로 제조공정에 투자할 여력을 만들어 줄 것입니다. 물론 독점에 가깝던 시장에서 활발한 경쟁 시장으로 진출한 것이니 여기에 대한 투자가 더 들어갈 것 역시 당연한 이야기이구요. 삼성과 TSMC에게는 당연히 그리 반가운 소식은 아니겠군요.

하지만 소비자 입장에서는 인텔의 이런 움직임이 매우 반갑습니다. 인텔의 공장에서 제조되어 더 우수한 전력, 성능 특성을 가지는 칩을 심은 제품들이 시장에 나올 것이라는 사실부터, 파운드리 업계의 경쟁을 부추겨 업계 전체의 공정 발전 속도가 가속화될 것이라는 기대들까지, 인텔의 참전은 모바일 시장에 큰 영향을 줄 것입니다.


* 고정비가 동일할 때 생산량이 두 배가 된다면 어떨까요? 위에서 봤던 그림과는 다르게 10nm 공정에 이르기까지도 계속해서 생산비용이 절감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인텔의 이런 결정은 모바일 시장 뿐만 아니라 PC 시장에도 큰 영향을 줄 것입니다. 더 큰 볼륨을 확보한 인텔은 좀 더 공격적으로 공정이전을 진행할 수 있을 것이고, 당연히 PC 시장의 인텔 칩 역시 이런 수혜를 입겠지요. 어째 AMD가 우울해하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기도 합니다.

바야흐로 반도체 시장의 최강자 인텔이 고고하게 관망하던 위치를 버리고 본격적으로 팔을 걷어붙였습니다. 물론 이런 상황을 '인텔의 굴욕'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필자는 인텔이 IT 업계 전반을 휩쓸고 있는 거대한 파도를 성공적으로 타넘어 더 큰 기회를 차지하기 위한 전략적인 움직임으로 보고 있습니다.

과연 인텔은 익숙치 않은 체질 개선에 성공할 수 있을까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팝콘입니다.

필자: Jin Hyeop Lee (홈페이지)

생명과학과 컴퓨터 공학을 복수전공하고 있는 대학생입니다.



참조
인텔, 본격적으로 파운드리 사업에 뛰어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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