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애플의 아이폰 매출이 전년대비 처음으로 감소했다. 스마트폰 시장의 둔화는 이미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천하의 애플이라도 피할 수는 없었을 것이지만, 그냥 예상하는 것과 실제로 눈앞에서 벌어지는 것은 큰 차이다.
하지만 애플은 아이폰을 대신할 새로운 성장동력을 발견했으니, 바로 서비스다. 지난 회계 연도 2019년 1분기의 애플 서비스 매출은 109억 달러. 6년 전의 39억 6천 달러에서 3배 가까이 늘어났다. 애플은 실제로 2020년에는 2016년의 서비스 매출의 두 배를 달성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오늘, 즉 25일(현지 시각)에 열린 이벤트는 애플이 서비스 중심으로 전환을 시작한다는 신호탄이었다. 애플이 서비스만으로 이벤트를 채운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고, 그만큼 흥미롭게 진행됐다고 생각한다.
(정리는 이번에 발표된 서비스 중 한국에 들어올 가능성이 높은 순으로 나열했다)
게임: 애플 아케이드
최근 모바일 게임 시장에서 가장 인기 있는 사업 모델은 소위 “현질 유도” 모델이다. 게임 앱 자체는 공짜지만, 안에서 파는 콘텐츠로 현질을 유도해 돈을 버는 방식. 게임의 중독성이 성패를 좌우하는 이 모델은 실제로 모바일이 기존의 콘솔 게임 시장을 훨씬 넘어서는 엄청난 규모로 커지는데 공헌을 했지만, 게임의 작품성이나 완성도에는 손해라는 의견이 많았다. 그러다 보니 특정 가격에 완성된 게임을 제공하는 일명 “현질이 없는 게임”들은 사실상 멸종위기종으로 분류해야 할 판이었다.
애플 아케이드의 존재 이유는 이 상황의 뒤집기다. 앱 내 구매가 없는 유료 게임들을 위한 이 서비스는 사용자들이 월 사용료(역시 아직 공개되지 않았다)를 내면 이런 유료 게임들을 자유롭게 내려받아 플레이할 수 있다. 아이폰과 아이패드뿐만 아니라 애플 TV와 맥에서까지 지원하고, 오프라인 플레이를 100% 보장한다. (산간지방에서까지 LTE가 터지는 한국이면 모르겠지만, 지하철 터널만 들어가도 신호가 안 터지는 곳에서 사는 사람 입장에서는 엄청난 메리트다)
애플이 아케이드로 제공하는 것은 정말로 “게임계의 넷플릭스”다. 사용자들은 아케이드에서 제공되는 유료 게임의 실제 가격 대신, 그저 “플레이” 버튼만 본다. 그 플레이 버튼을 누르면, 바로 앱 스토어에서 기기로 내려받는다. 영화를 사거나 빌리는 대신, 재생 버튼만 누르는 넷플릭스와 똑같다. 사용자들에게 “구매”라는 액션을 숨기면서 그 액션에서 유발될 수 있는 죄책감이나 망설임을 없애주는 것이다. 개발자들에게는 구독료를 통해 게임의 품질과 안정적인 수입을 동시에 유지하는 방법이 될 수도 있다.
애플은 가을에 론칭 시 총 100여 가지의 게임을 제공할 것이라고 밝혔다. 가을까지 론칭을 기다리는 건 물론 여기에 제공될 게임들(모두 iOS 독점이라고)의 개발 진행상황도 있지만, iOS 앱 코드를 macOS에서 재활용할 수 있는 “마지판”의 정식 버전이 가을에 나올 다음 macOS 버전에서 제공돼서 그런 것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TV 시리즈: 애플 TV+
오늘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녀석은 단연 스트리밍 서비스인 애플 TV+다. 이미 애플은 아이튠즈 영화나 TV쇼 등의 온디맨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었지만, TV+는 애플이 직접 제작하는 독점 콘텐츠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 “+”라는 이름이 암시하듯이, 기존의 TV 앱 경험에 애플이 자체 제작한 콘텐츠를 얹는 방식이다.
이날 이벤트에는 실제로 TV+ 자체 제작 콘텐츠를 제작하고 있는 제작자와 배우들이 나와서 자신의 프로젝트를 설명하는 시간을 가졌다. 스티븐 스필버그는 1920년대부터 출간한 공상과학 이야기 잡지인 “어메이징 스토리(Amazing Stories)”의 TV 영상화를 발표했고, 제니퍼 애니스턴과 리즈 위더스푼, 그리고 스티브 카렐은 여성 앵커들이 남성 기득권을 상대로 고전 분투하는 “모닝 쇼”를 발표했다. 그 외에도 제이슨 모모아와 알프리 우다드의 포스트 아포칼립스 시리즈 “See”와 “세서미 스트리트” 제작진의 스핀오프 퍼펫 쇼인 “Helpsters”, JJ 애이브럼스가 제작하는 로맨틱 코미디 “Little Voice”, 그리고 미드 “실리콘 밸리”로 유명한 쿠마일 난지아니가 제작하는 “Little America”가 발표됐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오프라 윈프리가 올라와 성폭행과 정신건강에 대한 두 개의 다큐멘터리 시리즈, 그리고 유명한 북 클럽의 귀환을 발표했다.
오늘 발표된 시리즈는 현재 애플이 제작 중인 시리즈 목록의 극히 일부다. 일례로 오늘 선보이지 않은 시리즈 중엔 “캡틴 마블” 브리 라슨이 제작하고 있는 CIA 배경의 스파이 스릴러 시리즈가 있고, “캡틴 아메리카” 크리스 에반스가 누명을 쓴 아들의 결백을 밝히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아버지를 맡은 “Defending Jacob”이라는 범죄 드라마 시리즈도 있다. (에반스는 이날 이벤트에 참석한 모습이 잠시 라이브 스트림 영상에 비치기도 했다) 애플이 이벤트 도중에 보여준 현재 참여 중인 아티스트들의 목록은 말 그대로 물량공세, 혹은 융단폭격이라 할 수 있다. 이벤트를 직접 관람한 디에디트의 “에디터H” 하경화 기자는 “넷플릭스가 스타트업임을 보여줬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와는 별개로 애플 TV+가 애플 자체 제작 콘텐츠에 집중하는 모습은 의외라는 의견도 많다. 다른 스트리밍 서비스들이 이미 존재하는 영화나 TV 시리즈의 판권을 구해 소비자들에게 메리트를 어필하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하지만 후발주자인 애플의 상황을 생각해보면 말이 된다. 특히 100개 이상의 국가에 빠른 속도로 서비스를 해야 하는 상황에서 판권 문제로 인해 발목이 잡히는 것은 골치 아픈 문제이기 때문이다. (넷플릭스가 2016년 한국 론칭 당시 오리지널 시리즈 외에는 볼 게 없다는 욕을 먹었던 시절을 생각해보자) 그래서 애플은 차라리 자체 제작 콘텐츠에 집중하면서 판권 구매의 시도에서 올 수 있는 많은 골칫거리를 없앴다. 어떻게 보면 100% 자체 제작 콘텐츠로 서비스를 충당하는 “돈이 매우 많이 드는 방법”을 선택한 것은 애플다운 결정이다. 물론 자체 제작 콘텐츠만 있는 만큼 가격을 경쟁적으로 책정할 것인가라는 의문점은 남아 있다. (애플은 이날 TV+의 구독료를 공개하지 않았다)
애플 TV+는 iOS와 tvOS(5월), 그리고 macOS(가을)에 제공되는 TV 앱을 통해 가을부터 서비스된다. 애플은 이 외에도 HBO, Starz, CBS All Access 등의 기존 스트리밍 서비스 중 필요한 것만 가입해서 바로 볼 수 있는 애플 TV 채널 서비스도 공개했다. 새로운 TV 앱은 5월 중에 배포된다.
금융: 애플 카드
애플이 신용 카드를 만든다. 고작 몇 달 전이었어도 이게 대체 무슨 소린가 싶었을 거다. 하지만 오늘 애플이 발표한 애플 카드는 일반적인 신용카드와는 좀 다르다.
애플 카드는 아이폰과 애플 페이의 인프라를 활용한다. 아이폰의 지갑 앱을 열어 폰 안에서 가입하며, 애플 페이를 받는 곳이라면 전 세계 어디든 아이폰으로 결제가 된다. 애플 페이로 결제하면 2%의 캐시백을 받으며, 애플 내 결제(스토어 구매, 서비스 관련 지출)는 3% 캐시백을 준다. 이러한 캐시백은 “데일리 캐시”라 해서 애플 페이 캐시 체크카드에 매일 저금하며, 이러한 캐시백은 애플 페이로 사용하거나, 카드값을 내는 데 사용할 수도 있다.
지갑 앱에는 카드 소비 정보를 자세하고 보기 쉽게 표시한다. 머신 러닝과 지도 정보를 활용해 정확히 어디서 카드를 긁었는지를 알아낸다. 카드값을 낼 때도 최소한의 이자를 낼 수 있는 최소값을 내도록 설정할 수 있고, 나눠서 낼 수도 있다.
애플답게 보안이나 개인 정보 보호에도 신경을 쓴다. 카드 정보는 무조건 아이폰 내부의 보안 칩에 저장되며, 애플 페이처럼 매번 결제할 때마다 카드의 보안 코드가 무작위로 생성된다. 애플 카드만을 위한 특수 인프라를 만들어 애플도 결제 내역을 전혀 볼 수 없으며, 애플 카드를 발급하는 은행인 골드만 삭스에서도 거래 내역을 제삼자에게 넘기지 않는다고 한다.
혹시나 애플 페이를 아직 지원하지 않는 곳을 위한 물리적 카드도 존재한다. 이 물리 카드는 티타늄으로 만들었으며, 카드번호나 보안 코드 등 어떠한 숫자도 없다. 어차피 아이폰에 다 있으니까.
애플 카드는 여름부터 서비스를 시작하고, 현재로서는 미국에서만 서비스한다. 한편, 애플은 올해 중으로 애플 페이 지원 국가를 40개 이상으로 늘릴 것이라고 밝혔고, 시카고, 포틀랜드, 뉴욕 등 미국 내 도시에 올해 내로 애플 페이를 이용한 대중교통 지불을 지원할 거라고 밝혔다.
뉴스: 애플 뉴스+
애플 뉴스가 나오기 훨씬 오래전, iOS에는 뉴스스탠드라는 것이 있었다. 앱 스토어에서 매달 구독을 통해 잡지를 제공하는 서비스였는데, iOS 7 즈음해서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었다.
이번에 나오는 애플 뉴스+는 그 잡지 구독 포맷의 부활이다. 물론 차이점은 조금 있다. 애플 TV+가 기존 TV 앱의 확장 개념의 서비스라면, 뉴스+도 기존 애플 뉴스에서 잡지 구독 등의 확장이다. 애플 뉴스가 그렇듯이 잡지를 아이폰이나 아이패드, 맥에 맞는 레이아웃으로 만들어 읽을 수 있다.
300여 가지의 잡지와 월 스트리트 저널 등의 신문, 그리고 복스(Vox)와 같은 온라인 미디어 콘텐츠가 제공된다. 이런 잡지들은 오프라인으로 저장해 읽을 수도 있으며, 기기 내 인공지능이 독서 습관을 감지해 잡지를 추천하기 때문에 구독자 관련 정보가 애플이나 퍼블리셔에게 넘어가지 않는다.
애플 뉴스+는 오늘 발표된 서비스 중 유일하게 바로 서비스를 시작했다. (미국과 캐나다 한정이지만) 월 $9.99 구독이며, 1개월 무료다.
과연 충분한가?
오늘 이벤트는 애플이 서비스 기업으로 새롭게 시작하는 첫걸음이었다. 하지만 첫걸음이니만큼 부족한 것, 그리고 우리가 모르는 것도 많다. 특히 애플 TV+는 여전히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고, 자체 제작 콘텐츠에 대한 이야기는 오늘 나왔던 아티스트들의 이야기와 30초짜리 예고편이 전부다. 오프라 윈프리는 심지어 자신의 다큐멘터리의 제목도 안 정해진 채로 무대에 나왔다.
하지만 단일 서비스뿐만 아니라 애플 서비스 전체의 스토리텔링에서도 구멍은 많다. 이 서비스들과 기존의 서비스들을 묶는 번들 요금제가 존재할 것인가? 이런 서비스들은 애플 기기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인가? (TV는 삼성, LG 등의 스마트 TV와 로쿠, 파이어 TV 등의 셋톱박스 탑재를 발표하긴 했다) 앱 스토어 하부 서비스인 애플 아케이드는 그렇다 치더라도, 애플 TV+나 뉴스+, 그리고 애플 뮤직을 제외한 기존 서비스들도 iOS 외에는 이용할 방법이 없어 보인다.
애플이 서비스에 본격적으로 뛰어드는 것은 여태까지의 애플과는 매우 달라진 양상이다. 하지만 현재 애플의 서비스 접근 방식은 여전히 애플 기기 우선에서 벗어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애플이 정말로 서비스를 활용한 성장을 하고 싶다면 이러한 인식의 변화는 불가피해 보인다.